배두나, “난 정말 운 좋은 배우!”

-원작인 고다 요시에의 단편 만화 <공기소녀>는 어떻게 보셨어요?
원작은 멜로 쪽에 초점이 더 가 있어요. 영화는 인간에 대한 시선이 더 많이 추가됐고요. 인간의 공허함, 텅 빈 느낌 등을 감독님이 추가하셨죠. 단편은 스무 페이지 정도였고 스토리 자체는 심플했어요. 공기인형이 어느 날 비디오가게 점원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비닐이 찢어지면서 공기가 빠지고. 모티프는 영화와 똑같은데 그 부분에서 감독님이 영감을 받으셨나 봐요. 공기인형의 찢어진 표면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여 공기를 불어넣는 그 장면을 찍고 싶으셨대요. 거기서 모든 게 출발했죠. 그 후 1년 넘게 대본을 쓰시고 캐스팅이 정해졌죠.

-고레에다 감독이 거의 9년간 준비한 작품인데 시나리오를 받은 첫 느낌은 어떠셨나요?
‘역시 고레에다 감독님이다!’ 싶었어요. 한국어로 번역된 시나리오를 주셨는데 한 편의 시 같았어요. 영화 자체가 시였죠. 느낌이 딱 오더라고요. 뭔가 구체적으로 적혀 있진 않았지만 그림이 떠오르고 정말 좋았어요.

-배두나 씨가 쓴 <두나’s 서울놀이>(2008)를 보면 다양한 취미 생활이 있는데 피아노와 드로잉에 관심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공기인형>에서 노조미가 드로잉을 하던데 그건 평소 두나 씨의 모습이 반영된 설정 아닌가요?
아, 드로잉! 굉장히 예리하시네요. 맞아요. 드로잉이라고 말하긴 좀 그렇고 낙서나 만화 수준이죠. 프리프로덕션 중 한국 배우가 혼자 앉아서 뭘 하겠어요.(웃음) 제가 낙서를 좀 했는데 감독님이 재밌게 보셨나 봐요. 대본에 그날그날 촬영한 신을 만화처럼 그려놓기도 했는데 어느 날 보니 노조미가 그림을 그리는 설정이 추가돼 있더라고요. 아예 항상 들고 다니는 노트를 준비해 주시고 계속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죠. 감독님이 굉장히 존경스러운 게, 본인 의도를 절대로 망치지 않으면서도 즉흥적인 유연함이 있으시더라고요. 배우의 장점이나 재밌는 부분을 많이 반영하시고. 천재 같았어요. 사실 일본 촬영 현장은 미리 준비하고 계획대로 하지 않으면 당황해 하는 부분이 있는데 고레에다 감독님은 새로운 것을 계속 추가하는 스타일이에요. 촬영장에서 단 한 번도 큰소리 지르지 않고 장난스러우면서도 의도대로 영화를 이끌고. 테이크도 보통 한두 번 정도밖에 안 가요. 처음에 너무 이상해서 진짜 오케이냐고 여쭤봤어요.(웃음)

-사실 <공기인형>은 자칫하면 일본 AV(성인 비디오) 느낌이 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어요. 감독 자체도 그런 부분을 경계한 듯하지만 실제로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더라고요.
소재가 파격적이긴 한데 그렇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어요. 내가 벗었을 때 야하지 않을 것이라는.(웃음) 그게 자신감인지, 열등감인지. 하하. 그리고 처음부처 이 영화는 야한 영화가 아니라고 감독님이 못을 박고 시작하셨기 때문에 믿음이 있었어요. 연기하며 몸을 사린다거나 야하게 보여선 안 된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고. 그냥 마음을 갖게 된 인형이 된 거예요. 제가 처음 등장하는 신 기억나세요? 노조미가 창가에 뒷모습으로 서 있는 풀샷 누드잖아요. 그때 창밖에 행인이 있었는데 제가 누드 상태인데 당황하지도 않고 연기하더라고요.(웃음) 반면 노조미가 사랑하는 비디오가게 점원이 노조미의 몸에 공기를 불어넣는 장면만큼은 좀 에로틱하고 관능적으로 찍고 싶었어요. 섹스 신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경험이잖아요. 남자의 호흡으로 여자의 몸이 꽉 채워지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이 몸 안에 채워지는 기분이란 건 사랑을 나눌 때보다 더한 기쁨일 것 같았죠.

-배두나 씨는 늘 배두나만의 독특한 느낌을 캐릭터에 불어넣으세요. 배두나가 보이는데도 그게 굉장히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워서 신기해요.
어, 저는 연기할 때 체화를 가장 중요시해요. 어떤 캐릭터를 하든 내 몸을 빌려서 하는 것이니까 제가 안 보이긴 힘들 것 같아요. 겉으로 흉내만 내는 건 못해요. 그래서 제 모습이 자꾸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근데 내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게 좋은 연기인지, 그 반대가 나은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린다 린다 린다>에서는 캐릭터 자체가 대사가 많지 않았는데, <공기인형>에서는 내레이션까지 하셨어요.
일본어 공부도 좀 열심히 했죠.(웃음) 진짜 열심히 한 사람 축에는 못 들겠지만. 자기 전까지 매일 연습했어요. 스태프들에게 제 대사를 다 해보라고 부탁한 다음 느낌이 좋은 발음으로 계속 연습하고. 가끔 현장에서 일본어 대사가 틀리면 감독님, 스크립터, 녹음기사 세 분이 달려오셨어요. 그리고 이 영화가 코미디 영화가 아닌 이상 관객이 제 일본어 대사를 듣고 웃으면 낭패라고 생각해서 무조건 열심히 했죠. 원래는 제 대사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내레이션도 배우마다 있었고요. 그런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부끄럽게도 제 목소리로 내레이션이 나오더라고요. OST에도 들어가고 영광이었어요.(웃음)

-배두나 씨는 1999년 데뷔 이래 쉼 없이 꾸준히 활동하셨어요.
그래도 요즘에는 많이 쉬고 있어요. 원래는 영화 한 편을 다 찍으면 개봉 전까지 다른 작품에 출연하면서 다작을 했는데. 2000년쯤이었나.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다작을 하면서 내 모든 것을 소모한 느낌이랄까. 배우로서의 경쟁력도 없는 것 같고 나 자신을 좀 더 아껴야겠다고 생각했죠. 가령 <린다 린다 린다> 전에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2003), <튜브>(2003) 같은 영화를 하면서 제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밑바닥까지 나를 소모시켜선 안 되겠구나, 좀 더 나를 채워야겠구나 하는 생각. 그러고 나니 더 편안해진 것 같아요. 드라마를 할 때는 좀 더 망가져도 보고 그냥 편하게 욕심 내지 않으려 해요. 생각해 보면 전 정말 운이 좋은 배우예요. 십수년 연기해도 대표작이 많지 않을 수 있는데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 스스로 대표작이 벌써 많다고 느끼거든요. <고양이를 부탁해>(2001), <복수는 나의 것> <공기인형> 등등. 분에 넘치는 감독님들을 만나 배우면서 연기할 수 있었어요. 사실 삶의 고난이나 슬럼프도 잘 모르고 살았어요. 그래서 연기할 때 하얀 백지 상태가 되는 게 수월한 편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 MovieWeek, April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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