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란 선천적으로 다르게 태어난 걸까? 아무리 많은 사람 사이에 섞여 있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단지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서 자주 봐왔기 때문에 느껴지는 류의 익숙함이 아닌, 스스로 발산하는 인력(引力) 같은거. 그날도 그랬다. 배두나라는 여배우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웃고 있었지만, 혼자서 500와트 짜리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위풍당당 여배우, 배두나의 어떤 하루.
스토카가 된 기분으로 그녀를 따라다닌 라이브한 결과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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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세트 촬영장에 도착해 건물의 로비에서 배두나의 세트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오전 7시부터 시작된 촬영이었다고 한다. <위풍당당 그녀>를 본 사람이라면, 드라마 전반을 배두나가 맡은 '은희'라는 캐릭터가 이끌고 간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대사와 촬영 분량은 장난이 아니었다. 컨디션이 엉망이겠구나라는 걱정이 앞섰지만, 배두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한 선배의 말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두나는 어릴 때부터 일을 시작했지만, 맺고 끊는건 분명한 아이야. 촬영이나 인터뷰 같은 것도 그래. 자기가 좋아서 하겠다고 말하면 정말 아무리 힘들거나 상황이 안 좋아도 최선을 다해. 그렇지만, 사전동의가 없거나 하기 싫은 작업들은 죽어도 안 해." 한 시간쯤 지났을까,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갖기 위해 배두나가 세트 밖으로 나왔다.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이 여배우에게서는 상상했던 것처럼 생기가 흐른다. 우선, 간단하게 이번 인터뷰의 컨셉을 설명했다. 여배우의 하루를 라이브한 느낌으로 담을 꺼라는 말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옷을 갈아입거나 메이크업을 수정하기 위해 분장실을 갈 때나, 두고 온 물건을 가지러 차에 갈때도, 심지어 촬영을 앞둔 세트 안에서 까지도 거북한 카메라를 마다하지 않았다. 역시 선배의 말이 딱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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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과요? 드라마 촬영이 있는 날은 다음날 새벽에 끝나기 일쑤고, 촬영이 없는 날은 대체적으로 잠을 자두고, 꼭 봐야 하는 영화를 보거나 꼭 만나야 하는 친구를 만나죠. 근데 영화를 하면 평균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쉬지만, 드라마는 하루 쉬기도 힘 들어요. 그래도 시간이 날때면, 디카로 찍은 사진들을 컴퓨터로 편집해서 제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해요. 인형 놀이를 하듯이 말이죠." 특히나 많은 대사량 때문에 고생이 많을 것 같았다. "커닝요? 그런 걸 어떻게 해요. 그게 더 어렵지 않나요?" 오늘 촬영분의 대사가 오늘 아침에야 나왔다고 한다. "원래 사투리 연습은 혼자 하는 편인데, 오늘은 워낙 급해서 도와주시는 언니를 불렀어요. 진짜 경상도분이라 제 사투리가 맞는지 잘 체크해 주시거든요." 그녀의 대본에는 분홍색 형광펜 자국이 빢빡하다. 약간 과장하자면 거의 다 줄이 그어져 있다. "저희 드라마 촬영 스케줄이 A팀과 B팀으로 나눠져 있거든요. 근데, 저는 두 팀 모두에 들어가 있는 거 있죠. 너무하지 않아요?" 물론 너무한 스케줄이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 있을거다. 그녀라면 결국 해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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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끝날 즈음엔, 그녀의 영화 두 편이 개봉관을 찾게 된다. <튜브>와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이다. 특히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에서의 캐릭터는 <위풍당당 그녀>와 그 느낌이 비슷할 것 같기도 해서, 직접 연기한 그녀에게 각 인물을 설명해 달라는 부탁을 해보았다. "<위풍당당 그녀>와 <봄날 곰을 좋아하세요?>의 캐릭터는 아주 다른걸요?(^^;). 하지만, 재료가 배두나니까 약간의 변주일 뿐일지도 모르겠네요. 참, 둘 다 귀여운 곰탱이인건 비슷해요. 두 인물 중 <봄날..>의 현채는 좀 더 여성스럽고, 소녀적이죠, 지적이기도 하지만 소심한 편이구요. 하지만 <위풍당당 그녀>의 은희는 가난하고 무식한데다 못난이에 가깝잖아요. 억세고 막무가내지만, 당당해요. 제목처럼 위풍당당한 캐릭터랍니다. 이 두 캐릭터는 드라마와 영화, 매체가 다르기도 하지만, 연기하는 건 다 힘들어요. 다만 제 경우엔 드라마는 현재진행형이고, 영화는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영화는 오랜 세월 내 곁에 남아 완성본으로 따라다닐 테니까요. 아무래도 작품 선택에 신중을 기하는 편이죠. 드라마는 흘러가는 거니까 다양한 도전이 수월해요. 그래서 드라마할 때는 편하게 작품에 임하는게 중요해요. 그래야 제 속에 있는 많은 것들을 시험해 볼 수 있거든요. 지금처럼요(웃음)." 배두나는 매체와 매체 사이를 유연하게 오간다. 영화<링>에서, TV속에서 느물느물 기어나오던 사다코에서부터 시작된 그녀의 스크린 도전은 그녀의 캐릭터적인 특성, 즉 예쁘고 깜찍하기만 할 것 같은 일회성 이미지를 단숨에 뒤엎었고, 드라마 <학교> <광끼>와 영화 <플란다스의 개>, 그리고 다시 드라마 , 다시 영화 <청춘> <고양이를 부탁해> <복수는 나의 것> <굳세어라 금순아> <튜브>와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그리고 다시 <위풍당당 그녀>까지로 이어지고 있다. 그녀는 어느새 정말 한국의 위풍당당한 여배우로 자라있다. 그때, 어디선가 그녀를 급히 부른다. 다음 씬 촬영 때문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트가 있는 스튜디오로 향한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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슛이 들어가기 전, 그녀는 세트에서 동선과 움직임. 대사 등에 대한 감독의 의견을 귀기울여 듣는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아기도 '진짜 엄마'의 품에 안겨있다.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고 스튜디오 안은 숨소리 하나 들리자 않는 정적속에서 모든 시선이 배두나에게로 향한다. 그녀, 연기를 시작한다. "나는 아무런 기초 없이 연기를 시작했어요. 그래서 방법론 같은 건 잘 몰라요. 하지만, 연극을 하신 어머니는 가끔 제가 연기하는 걸 보시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웃으실 때가 있어요. 저는 대본을 많이 보는 편이예요. 우선 내가 만들어야 하는 인물을 공략, 그 인물에게로 쭉쭉 다가가요" 그 날도 그녀는 항상 대본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연기는 종합예술이죠. 문학도, 음악도, 패션과 사진을 포함한 그림도 모든 걸 알면 알수록 연기를 하는데 도움이 돼죠. 그래서 항상 난 아직 멀었다는 갑갑함을 느끼기도 하구요. 어떨 땐 내 영화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 마냥 행복해질 때가 있어요. 하지만, 소중한 내 영화들이 흥행이라는 벽을 못 넘어가더군요. 그래서 내 속에선 연기에 대한, 그리고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괴로움이 공존해요. 시간이 지나도 영화는 어차피 내 곁에 오래두어야 하니까 작품성은 꼭 따질 거예요." 그녀의 코디네이터가 슬그머니 다가와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며 그녀을 분장실로 데리고 간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분장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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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무슨 스토카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배두나의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나는 그저 아는 친구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는 착각이 든다. 생각해 보니, 내가 배두나를 다시 보기 시작한것은 영화<고양이를 부탁해>를 통해서였다. 스무 살의 설램과 불안이 공존하는 느낌을 '태희'라는 약간 엉뚱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그녀의 솜씨는 보기 드문 여배우를 만났다는 기분이 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녀는 언제부터 스스로 자신의 연기에 눈을 떳다고 생각한 걸까? "연기에 눈을 떳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지금껏 연기에 대해 공부를 해오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거예요.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일상을 익혔어요. <청춘>에서는 감성이란 걸 익혔고, <고양이를 부탁해>에서는 호흡을 익혔어요.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치열함이란 걸 익혔고, <굳세어라, 금순아>에서는 자유로움을 익혔어요. 앞으로도 계속 많은걸 흡수할 꺼예요. 스펀지처럼...." 연기는 그녀에게 많을 걸 가르쳐주고 있나보다. 그래서 그녀는 또래들보다 조금 더 어른스럽고, 조금 더 인내할 줄 알고, 조금더 여유롭고, 조금 더 반짝거리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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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배두나의 배우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저, 그녀가 보란 듯이 비상할지만을 기다릴 뿐이다. 언젠가는 스스로가 원하는 자리에 오르리라. 그녀가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인생이 있을까? 특히 여배우의 일생. "글쎄요, 그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윤여정 선생님이나 고두심 선생님처럼 오랫동안 연기하시는 선배님들이 좋아 보이기도 해요. 한편으로는 심은하 선배님처럼 정상에서 문득 쉬어버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사랑받은 만큼 되돌려주고, 그 다음에 자유로와지고 싶어요."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그녀다운 대답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사랑받는 데 익숙한 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배두나를 자신의 20년간 기획 상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를 특별하게 키웠다. 배두나의 어머니가 한겨울에도 초등학생인 그녀에게 미니스커트를 입혀놓고, 추워도 참아라. 예뻐지려면 대가가 따른다고, 대신 외모를 드러내려면 속이차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날 이야기다.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위풍당당하게 홀로 선 지 오래다. "연기 무대를 계획 중이예요. <청춘 예찬>의 박근형 연출의 <삼총사>(가제)라는 작품인데, 아직 대본이 완성된 상태는 아니지만 믿음이 가는 분들과 작업하는 거라 자신있게 선택했어요. 6월쯤 무대에 오를 것 같아요. 그 전에 뱃심을 제대로 길러두려구요(웃음). 참, 그리고 <위풍당당 그녀>를 마무리할 때쯤, 제 영화가 두 편 개봉 예정이랍니다. 대구 지하철 사고가 있어 개봉이 미뤄진 <튜브>와 김남진씨와 작업한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가 기다리고 있어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제 영화들은 흥행에 실패한 경우가 많았어요. 개인적으로 너무 가슴 아팠지만, 개봉 후 영화의 운명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다만 최선을 다한 것에 만족을 해야죠. 영화가 내게 가르쳐준 게 얼마나 많은데요." 바쁜 촬영은 날이 어두워져도 계속되었다. 의정부 세트 여기저기를 누비며 자신의 하루를 보내고 있는 이 전도유망한 여배우의 하루는 아직 생기를 머금고 있다.

editor . 임지혜 / photographer . 김명미
© S U R E .. 2003,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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