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리리... 일주일 전 점심 무렵 사무실. 울리는 폴더를 펼치면서도 한 손으로는 그릇을 쥔 그립을 풀 수가 없었다. 몇 명이 중국음식을 함께 주문, 테이블에 늘어놓고서는 다소 어그래시브하게 식사에 임하는 중이었기 때문. 목소리 주인공은 프리미어 편집장, 이 아줌마가 내게 전화했다면 사연은 한 가지다. 5개월 전 '최고의 배우, 최민식' 인터뷰적 '다음엔 여배우' 약속을 드디어 지키려는 것이었다. 흥분했다. 누구야, 배두나. 컥.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배두나라면, 개구리 왕눈이 아니더냐.

4년 전 어떤 잡지 커버에서 거짓말 조금 보태 '빨간 다라이' 만한 눈에, 감성과 이성 어느 쪽에도 지배되지 않는 순간적 진공 상태가 발생한 듯한 얼굴을 한 여자아이를 봤다. 입술두덩 아래 묘하게 그늘이 져서는, 거기서 표정이 시작되는 희한한 마스크 였다. 한참을 쳐다보다 음... 개구리 왕눈이, 하는 만족스런 결론에 도달했고 배두나 파일은 그 지점에서 입력종결 처리됐다. 그 날 이후 난 솔직히 그녀를 한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우르르 왔다가 주르르 사라지는, 신세대 스타라 불리는 수많은 '워킹 프로트 타입' 중 하나겠거니 하고는 간단히 관심을 끊었다.



그런데 그 배두나라는 거 아닌가 지금. 내가 영화를 아나, 연기를 아나. 그저 디자인 화려한 여배우들 인터뷰 빙자해서 실물이라도 한번 보려는 얄팍한 속물 수작인데. 이러면 이거 이거 배신이다 배신. 단호히 안 돼를 외치려는 순간 "다음엔 또 여배우", 이 한 마디에 핸드폰에 대고 고개까지 끄덕이며 "응"이라 답해줬다(두나야, 이 총수 오빠를 용서해다오. 사실은 넌 그렇게 선택받았단다.)

그래도 최소한 출연 영화 한편은 봐야겠다는 벼룩 낯짝에 한참 들끓던 식자들의 금 모으기 운동에도 생략했었던<고양이를 부탁해>를 본 건 인터뷰 전날. 영화는 참신했지만, 그리고 그렇게 몇 편 묶어 밀어 준 맥락은 충분히 이해 갔지만, 영화 그 자체로는 금까지 모을 건 없었다 싶었다. 그런데 난 거기서 4년 전 개구리 왕눈이가 이제는 그럴듯한 배우가 되어가고 있는 걸 발견했다. 여태 그 바닥에서 살아 남았다면 오로지 그 포스트모던 했던 비주얼 덕택인 줄 알았더니, 그래서 "유진하의 한을 담아" 원수뿐 아니라 관객들까지 처치해버리는 '필살국어책낭독비술'의 비천무-김희선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더니 말이다. 슬그머니, 완전히 건너띈 4년이, 쪼금, 미안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그녀가 살아남은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직접 만난 건 2002년 2월 어느 날 오후 강남 모 스튜디오. 무슨 태양 담배 껍데기 같은 종이말이에다 애를 집어놓고 이리저리 굴려가며 찍어 대는,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엔 '별 지랄을 다 시키는구나..' 컷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인터뷰를 위해 옆 건물 빵집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건 촬영 시작 후 한 시간이 지나서. 0.5미터 맞은편에 배두나 외에도 기자, 매니저, 코디, 영화사, 투자사 사람들까지 테이블을 메웠다. 그리고는 어여 인터뷰하라는 표정으로 빤히들 쳐다본다. 윽, 이런 조또. 뭐 도주와 증거인멸의 위험 있는 범인도 아니고 이런 '두텁게 에워싸고 정면으로 대질시켜!' 포맷으로 우짜자는 건지. 가까이서 본 배두나의 디자인이 생각보다 약 10.5배는 미려해 잠시 혼미했기 망정이지, 그 각에서 무슨 인터뷰가 되겠나. 더구나 곹 여화 촬영 가야 한다는, 처음 만난24살 여배우를 붙들고 말이다. 주최측. 이거 패시브.

하여간. 시간도 없는데 접대용 멘트 적당히 토스하다간는 바로 날 샐거 같아서 우선 그녀가 가질 경계심. 그 총량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고자, 배도나 당신 인간성은 관심없고, 그저 배두나만 관심있다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는 <고양이...>에서 맡았던 배역, 그 사람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이 친구가 그 배역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한 건지 그것부터 궁금했기 때문이다.

글쎄... 글런 질문은 처음인데요. 음... 고정관념이 좀 없구.....

그리곤 쉽게 말문을 잇지 못한다. 의심스러웠다. 그냥 우연이었던가, 배역이 배두나 맞았던 거지, 배두나가 그 배역을 연기해낸 게 아니었던가. 글쎄, 아부지가 워낙 가부장적이라... 거부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 라며 약하게 퉁을 쳤다...

그런 면도 있죠. 근데 가출한건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에요. 자신만의 다른 이율 찾겠다는 거지. 사실 마직막에 비행기 타고 어디론가 가는 거 맘에 안들어요. 워킹홀리데이 하러 가는 거 같잖아요.

호. 워킹홀리데이. 오히려 가볍다... 듣고보니 그랬다. 그리고 비행기 뜨는 엔딩을 무슨 억압으로부터의 탈출과 자유 같은 추상과 상징으로 대충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이 확실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것으로 치환할 줄 아는 능력, 그 적확함, 그리고 그에 대한 여러 질문에 꽤 직설적이기에, <고양이...>는 식자층이 봐줘야 하는 영화로 밀었는데 그럴만했나, 라며 좀더 위험한 코너로 밀어봤다.

인터뷰용 멘트 해야 하는 건가요? 헤헤. 이번에는 그런 인터뷰 아닌 거 같애. 음... 좋은 영화니까. 근데,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과포장된 면도 있어요. 사람들이 안 보는 거에 과민방응해서 좋지 않으면 안 되는 영화가 된 면도 있어요. 차라리 20~30만 명 봤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까요. 그래도 얼마나 좋은 영화인데요...

호. 이 친고 보게. 혹시나 싶어 사람들이 패션 리더라는데 맞냐고 물었다. 아니란다. 코디 언니가 해주는 거란다. 잔머리가 없다. 그럼, 지금 우린 이 인터뷰 왜 하고 잇는 거냐 물었다. 대뜸 답하고 스스로 파안대소 한다.

영화 홍보하려고, 우하하하.

이 대묵에서 <복수는 나의 것> 홍보를 위해 인터뷰 섭외를 했던 영화사, 제작사, 맞은편 매니저 아자씨느 미간에 근육 잡혔는지 모르겠으나, 어차피 영화 홍보에 관심 없던 난 배두나의 이 거침없음에 거의 통쾌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한 번 보고 싶었다. 어디까지 가는지. 인터뷰 직전, 기자 양반이 최근 스캔들에 대해 내가 짓궂게 굴까봐 홍보팀에서 걱정한다며 모른 척해달라 한 것이 생각났다. 모른 척이라, 그래 이런 거 가지고 짓궂게 굴면 안 되지. 배두나씨 요즘 연애한다며. 안 짓궂게 직선강타.

"스캔들 아니고 사실"이란다. 그러면서 웃기만 해도 '사랑에 빠진 그녀'라고 오버하는 언론이 너무 싫단다. 물론 싫겠지만, 그 관심 덕에 지금 배두나가 누릴 수 있는걸 누리고 있는거 아닌가, 감수할 부분 있는 거 아닌가 했더니 "그것도 사실"이란다. 꼬인 데가 없다. 그럼 신하균은 어떤 남자냐 물었다. 갑자기 하이 소프라노로 "너무 멋진 사람!" 이라고 외치곤 볼따구가 온통 홍조다. 허, 멋진 아가씰세. 감자기 신하균 동지가 부러워졌다.

그리고 그녀가 그 판에서 살아 남은 이유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벌써 한 시간 타입업. 이제 겨우 시작이구만 궁시렁거렸더니 자기 밤마다 채팅한단다. 프리미어 역사상 최초의 채팅 인터뷰는 그렇게 배두나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자신감이 있다. 타인고 비교우윌을 통해 획득하는 상대적인, 내가 더 예쁘고, 더 돈 많아서 생기는 그런 자신감. 대부분들 거기 기대 산다. 이런 건 그러나, 더 예쁘고, 더 많은 돈 앞에서 꼬리를 만다. 반면, 남고 비료를 통해 미혹되거나 고래 숙이는 법이 없는 자신감이 있다. 자신을 이루고 있는 자신들에 스스로 만족하고 당당해야 비로소 얻어지는 자신감. 공주병과의 결정적 차이는,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인지, 인정한다는 점, 낮에 본 배두나는 후자에 속하는 드문 케이스 였다. 모르는 건 서슴없이 모른다 하고 약점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본심을 말함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유.불리를 먼저 따지지 않되, 덜 정리되었으나 나름의 입장을 가지는 거, 이런 건 그 나이에 혼자 되는게 아니다. 부모님이 궁금했다.

같은 날 밤 11시. 본인은 민족정론의 총수로서 "높은 사람"이고 사회적으로도 훌륭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이제부터 반말할 것이라 통보했다. 다소 반항이 있었으나 언제나 자신있는 완력으로 제압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고양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이야기가 나왔다. 자기가 만두 먹는 장면 아니냔다. 아줌마가 전자레인지에 약 데우는 장면이라 했더니 놀라며 왜냐고 묻는다. 우리 나라 가부장 시스템을 전자레인지를 바라보는 아줌마 표정 하나로 온전히 담아내서 인상적이었다 했더니, 자기 진짜 엄마란다. 허거덕덕.(턱탈골음) 엄마가 연극배우시란다. 오호, 그럼 그렇지. 이제야 뭔가 알 것 같았다. 연기 지도 해주시냐 물었다. 마음이 동하기 전에 기술을 배우려 하지 말라고, 기술부터 배우면 탄성에 젖어 마음이 동하기 힘들다 하셨단다. 무릎을 쳤다. 그래서 자긴 조급하지 않게 마음을 동하게 하는 연습부터 시작했단다. 그러면서, 자기 이제 그거 쪼금 된다고, '히히히'를 덧붙이며 자랑한다. 자랑해도 되겠다.

스토리는 이어졌다. 엄마가 자길 희한하게 키우셨단다.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라는 말씀은 전혀 없고, 다른 부모님들이라면 싫어할 짧은 치마에 튀는 옷을 입게 했단다. 그러면서 이런 옷 입으려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입고 머리가 비면 천박해 진다고 하셨단다. 그래서 쎄빠지게 공부했단다. 배두나는.


더 해보라고 했다. 자기가 처음 풀연한 영화가 <플란다스의 개>란다. 그런 영화가 있었나 했더니, 난리를 치는 강도로 보아 꽤 자랑스러운가 보다- 그런데 원래 그 배역에는 고소영을 캐스팅하려 했고, 고소영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단다. 영화사를 찾아간 엄마는 딱 한 마디를 하고 돌아 오셨단다. 두나는 내 20년 기획 작품이다. 믿어도 좋다. 그리곤 그 배역을 땄단다. 씨바... 멋지다.

그 날 그렇게 밤새 5시간을 채팅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다음날도 했고, 또 그 다음날도 했다. 난 이제 배두나가 누군지 알 것 같다. 버리는 패로 따닥에 쓸한 기분, 그거 아시나들 모르겠다. 난, 아직 한번도 좌절해 본 적이 없다는 이 매력적인 아가씨가 앞으로 충분히 좌절하고 실패하고 실연하길 바란다. 그것도 많이 바란다. 물론 그러지 않고도 어딘가에 가 닿긴 할 게다. 하지만, 난 기왕이면 넘어져 다치고, 엎어져 울고, 가슴 아파하며 방황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내 딸도 아닌데 뭐, 그리고 그런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난 그녀를 밑도 끝도 없이 응원해 주리라. 다시 고개를 들어 스스로 힘을 내고 두 발로 섰을 때. 이 영민한 배우가 발휘할 에너지는 대단할 게다. 아직 배두나는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다.(다만, 이번 발언으로 두나 엄마 눈에 띄는 건 삼가는게 본 충수 신상에 좋지 않을까 싶다.)

<복수는 나의 것> 아무래도 봐야겠다.

글, 김어준(딴지총수)   사진, 김재성
프리미어 한국판,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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