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HAPSODY IN BLUE
서른넷 두나의 겨울을 기록하다.
Photograph Mok Jung-Wook, Editor Han Je-Hee.

사람의 기억은 이기적이다. 기억하기 좋은 것은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쉽게 잊는다.
기억 체계 자체가 자기 합리화하길 좋아한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인과 이별을 해도 나쁜 기억들을 거르고 걸러서 결국 다시 연인을 추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배우에게 대중의 기억이란 연인보다 잔인하다. 줄곧 팬이었다고 생각했던 에디터조차 여배우의 시간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꺼내들더라. 검은 코트를 입은 차분한 실루엣으로 다가온 배두나를 낯설어하며 내 자신이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을 찾고 있음을 깨달았다. 기억은 싸이월드와 두나넷에서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하던 시절에 머물러 있다. 인터뷰를 진행하기 열흘 전쯤 케이블 방송에서 <플란다스의 개>를 다시 본 것도 이러한 이기적인 기억에 일조했을지 모른다. 이는 최근 몇 년간 그녀가 배우로서 더 큰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사실과는 영역 자체가 다른 기억 즉 대중의 기억이다.

생기 있고 발랄한 모습으로 스튜디오에 등장할 거라는 상상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배두나의 얼굴을 감싸는 검은 머리카락들은 눈을 덮을 정도로 길어서 차분하면서도 예민한 느낌을 받았는데 특유의 커다란 두 눈이 아니었다면 이전에 여기저기서 마주쳤던 배두나와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안면이 있는 스태프들과 최근 막 촬영을 끝낸 영화 <도희야>에 대해 얘기하며 그녀는 보이지 않는 무장을 해제시켰다. 거울에 비친 하얀 얼굴에 살짝살짝 눈에 띄는 잡티들은 분명 영화 촬영의 흔적일 것이다. 화장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그녀가 고된 촬영 현장에서 스킨케어까지 신경 썼을 리 없다. 메이크업을 받는 그녀의 뒷머리를 보며 머리카락이 참 빼곡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 가닥 삐죽 올라온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을 발견한다. 그러고는 이내 이기적인 내 기억을 고친다. 배두나는 서른 중반의 여배우라고. 이 짧은 한 문장은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드라마 출연이 2010년 '글로리아'가 마지막예요. 스크린을 찾지 않으면 당신의 연기를 볼 수 없어요. 어느 순간, 생각에 전환점을 맞은 건가요? 나름대로 영화와 드라마를 병행하면서 활동해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활동 비중이 영화로 옮겨 갔죠. 해외 활동도 늘었고요. 점점 "배두나는 요즘 뭐하지?"라고 묻는 이들이 많아졌죠. 드라마의 경우, 대중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먼저 시나리오를 찾아서 읽고 노크를 한 적이 없었고요. 연출 선생님이 "이건 배두나가 해야 된다"면 그 역할을 맡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별 욕심 없이 즐겼어요. 하지만 영화는 달라요. 예전에는 진짜 까다롭게 작품을 골랐어요. <복수는 나의 것>처럼 한 장면을 찍어도, 빛나는 역할이 좋았어요. 지금은 많이 변했어요. 이제는 영화 전반적인 걸 보게 되더라고요. 작품은 좋은데 내 캐릭터가 심심하더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까다로운데도, 지난주 촬영을 끝낸 <도희야>의 출연은 굉장히 빨리 결정했다고 들었어요. <복수는 나의 것>보다 더. 시나리오를 읽을 때 그냥 빠져들었어요. 읽자마자 출연하겠다고 5분 만에 문자를 보냈죠. 처음 한두 줄을 읽을 때부터 글에 호감이 갔어요. 술술 잘 읽히고, 잔잔하면서도 확 파도가 몰아치고, 예쁜 영화인 듯하면서도 잔인하고, 저예산 영화지만 내 필모그래피에 넣으면 참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죠.

내년 5월에 개봉하지만, 미리 어떤 내용인지 이야기해도 될까요? 경찰대를 졸업한 여경 '영남' 역할이에요. 젊은 여자 파출소장으로 서울에서 일하다가 불미스러운 일로 시골 마을 파출소에 1년간 내려가 있게 되죠. 거기서 도희를 만나요. 아동 학대를 당하는 것도 알게 되고. 경찰로서 책임감뿐만 아니라 모성으로 도희를 보호하면서 생기는 일을 그린 영화에요.

32시간 촬영한 날은 페이스북에 남길 만큼 힘들었나봐요. 장시간 욕조에 들어가 있으면서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꼈을 것 같아요. 저예산 영화라서 어떻게든 회차를 줄여야 해요. 하루를 이틀처럼 썼어요. 아침 7시에 모여 다음날 아침에 촬영을 마쳐요. 마지막 촬영은 아침에 시작해서 그 다음날 점심에 끝났어요. 해도해도 너무한다 했지만, 웃었어요. 어이가 없잖아요.(웃음) 물 속에 너무 오래 있어서 피부 트러블도 생기고. 그리고 여배우가 욕조에 있으면 모든 스태프가 긴장해요. 남자 스태프의 모니터 앞 이동은 금지되고, 커튼 뒤에서 기다리게 되죠. 그것이 참 싫어요. 스태프들이 내 몸을 보러 온 것이 아닌데 마음이 불편해요. 그래서 더 웃고 떠들고 기념사진 찍고 그랬어요. 결국 웃으면서 촬영을 끝냈죠.

촬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아직 여운이 많이 남아 있나요? 아직까지는요. 혼자 운전하고 오는 길에 찍은 신이 생각나고, 특히 도희 얼굴이 잔상으로 남아있죠. 그런데 나는 캐릭터 의상을 입고 메이크업을 받아야 완벽하게 그 인물이 돼요. 그런 도움을 받아야 해요.

아까 메이크업하는 동안, 연기할 때 메이크업을 두껍게 하면 피부에 표현되는 감정이 가려진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본인은 연기를 못하는 편이니,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이전 인터뷰를 보면 대중이 잘한다고 평가하는 연기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더라고요. 본인은 그런 연기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도 알고. 허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열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연기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 대해, 별 관심이 없어요. 단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에만 집중해요. 열연을 하며 전부 설명하면 좋은데, 관객들이 내 연기를 보면서 상상하게 하는 것이 더 재밌어요. 지금 캐릭터의 감정이 어떤지 궁금하게 만들고 싶어요. 그것이 내 자신이 원하는 연기의 방향이고요. 정말 슬프면, 펑펑 눈물로 슬픔을 남김없이 보여줄 수 있지만 오히려 울음을 참아요. 그러곤 관객에게 '상상하세요', 이런 방식이죠. 건방져요. 그래서 예전부터 '불친절한 배우'라고 설명해왔고요. 연기가 마음과 기술이라면, 기술에 초점을 두지 않았어요. 지금도 상대의 연기에 따라 내 연기가 달라지기도 해요. 단독 샷에서, 상대 배우에게 앞에 서달라고 부탁해요. 가끔 창피하죠. 기술은 앞으로 더 배워야 겠죠.

그러한 감정 표현에 대해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감독과 배우들이 입을 모아 극찬했어요. 워쇼스키 감독의 차기작 <주피터 어센딩>까지 찍게 되었으니까. 영화를 보며 새삼 당신의 눈이 굉장히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 눈은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되죠. 이 눈이 아니었으면 진짜 연기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고마워요. 유치한 말인데, '마음의 창'이라는 말도 맞아요. 내가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이 알아요. 내 눈을 보고서. 그걸 어느 순간 터득하고는 가만히 상대배우를 바라보는 신에서도 실제로 생각하고 있어요. 텔레파시를 보내요. 연기하는 게 체험하는 거잖아요. 대사나 지문들이 눈으로 전달되었다가 온몸을 돌아서 나오는 게 연기잖아요. 사람들이 눈을 보고 알더라고요. 내가 어떤 마음인지. 그래서 <클라우드 아틀라스>때는 예쁨을 많이 받았죠. 감독님이 모니터를 보고, '조금만 더'하면 내가 조금 더 진행하더래요. 생각만 해도 내가 움직이더래요. 감독님은 그런 내 눈과 절제된 감정 표현을 좋아하시더라고요.

예전 배두나에게는 스토리가 있었어요.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는 친절한 스토리. 두나의 놀이 시리즈도 그랬고. 최근 의류 광고에서 오빠랑 출연한 모습이 참 오랜만이고 반가웠어요. (웃음) 요즘 SNS를 잘 안 하죠. 당시에는 소통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또 젊을 때 즐기자는 마인드도 있었죠. 당시 배두나처럼 살고 싶다는 하이틴이 많았어요. 사진 찍고 꽃꽂이도 하면서 여러가지 취미 생활을 하는 모습이 그들에게 영감을 준다면,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더 이상 보여주면 영화 캐릭터로 다가가는데 문제가 되겠다라고 판단했죠. 캐릭터가 안 보이고 배두나가 보이는 것을 경계했어요. 자진해서 나를 드러내는 일을 최대한 배제하죠. 당시에도 모르진 않았어요. 예전 미니홈피에도 절대 제 의견을 쓰진 않았으니까.

당시 카메라는 좋은 소통의 툴이었어요. 소통만이 아니라, 본인의 삶에도 즐거움을 주는 도구였죠. 카메라만 한 또 다른 툴이 생겼을까요? 글쎄요. 음... 딱히 도구는 없는데, 몇 년 사이 다른 문화를 배우는 데 재미를 느껴요. 언어를 열심히 배웠는데, 결국 문화를 알아야 말을 할 수 있어요. 그 재미에 빠져있어요.

사실 처음 스튜디오에서 봤을 때 분위기가 달라져 낯설었어요. 생각을 정리해보니, 나이도 무시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예전의 내가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나요.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20대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고요. 여전히 호기심이 많고 장난치는 모습은 똑같고요. 아무래도 나이가 들었으니 분위기는 달라졌겠죠.

포털사이트의 필모그래피에는 오래된 작품이어도 출연진은 최근 모습으로 소개되어 있어요. 당시의 사진을 사용했으면 할 때도 있어요. 그리워서요. 단순하게, 과거는 단 하루도 뒤돌아보지 않아요. 낭만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현재가 가장 중요해요. 미래도 생각하지 않고요. 필모그래피도 마찬가지에요. 현재 최선을 선택하되, 뒤돌아보지 않아요. 지나치게 그런 성향이 있죠.

어쩌면 바빠서, 대중은 모르지만 본인 스스로 뭔가에 집중하고 있어서인가요? 늘 뭔가 하고 있기는 해요. 작품을 안 한 작년 한 해 동안 영어를 죽을 힘을 다해 배우고 있었으니. 그러느라 나의 행보를 뒤돌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아까 살짝 흰 머리를 봤어요. 깜짝 놀랐죠.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본 두나의 모습은 더 이상 없겠죠?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나요? 20대에 30대의 내 모습을 많이 기대했죠. 20대 때에만 맡을 수 있는 역할을 주로 해왔고요. <플란다스의 개>나 <고양이를 부탁해>는 정말 스무 살 때에만 할 수 있는 역할이에요. 그래서 서른이 넘으면 난 더 멋있고 여성스러워질거야!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죠. 그래서 굉장히 기대를 했죠. 사실 그런 쪽으로 나이 먹는 건 좋아요.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생겨요. 사람이 좀 무게감이 있어 보이는 건 마음에 들어요. 아직까지는 괜찮은데, 나이로 인해 캐릭터에 제한이 생기고 배우 생활에 선택을 해야 한다면, 뭐 결국 따라가야죠.

어머님의 모습도 보이더라고요. 닮았다고 해도 예전엔 잘 못 느꼈거든요. 어머니처럼 이제 가정을 이루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음... 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아무리 배우로 인정을 받는다고 해도, 먼 훗날 아이가 없다면 그 삶이 성공일까, 행복한 여자일까 그런 생각을 해요.

그간 인터뷰에는 아버지 이야기가 별로 없어요. 아버지의 응원이 궁금해요. 처음에는 배우의 길을 반대하셨어요. 성공하면 크게 성공하고 실패하면 완벽히 실패하는, 중간이 없는 길을 가는 것이 싫다고요. 한 번 만류하시고 난 후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세요. 가령 <공기인형> 출연 제의가 들어왔을 때, 배우는 노출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좀 망설였거든요. 그런데 아버자기 반색하셨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부르는데 왜 망설이냐고. 딸이나 여자가 아니라 배우로 봐주세요. 그때마다 좋은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죠.

배우의 삶은 갈수록 더 어렵고 고독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소신대로 작품을 선택하고 깊이 파고들 때마다 외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경력이 쌓일 수록 외로운 것은 사실이고, 의식적으로 매너리즘에 빠지는 스스로를 깨뜨리려고 많이 노력해요. 내 자신이 더 강해져야겠다고, 또 외롭지만 견디면서 새로운 것을 계속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주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도희야>를 하면서 체력적으로 힘들었는데, 그때마다 나를 나에게 기대야 하는 것이 굉장히 외로운 일이긴 했어요. 하지만 모든 스태프들이 힘든데, 오히려 내가 더 잘해서 그들에게 힘이 되고 싶은 마음도 함께 존재하죠.

요즘 매니저 없이 일하고 있어서 조금 놀랐어요. 오늘 아침에도 혼자 일찍 스튜디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면서요. 매니저와 계약이 4월에 끝났어요. 그 이후로는 혼자 활동해요. 사실 <클라우드 아틀라스>때도 혼자 가서 영화를 찍고 오는데 불편함이 없었어요. 공항에 드라이버가 도착해 있으니 별 무리가 없었죠. 또 영화 현장에서는 '내'가 아닌 맡은 캐릭터로만 있으면 돼요. 파출소장 영남이 어떤 서비스를 받을 필요는 없잖아요. 물론 체력적으로 힘들 때가 있죠. 촬영이 전라남도에서 진행되었을 때는 힘들긴 하더라고요.(웃음) 5시간씩 운전했으니까. 한편 혼자 운전하면서 신나고 자유롭기도 했고. 좋은 시행착오였죠.

어느 정도 명성도 얻고, 금전도 채우고 나면 힘든 일을 하기가 어렵잖아요. 편하게 살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했으면 절대 이 직업을 택하지 않았겠죠. 대학 졸업 후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했을 거에요. 그렇다고 이 직업을 평생 하겠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미치도록 파헤치고 싶고, 배우고 싶고, 좋은 작품 만들고 싶어서 연기하지만 싫증나서 '빵집 할래!' 할 수도 있죠. 어떤 책임감 때문에 하지는 않아요. 좋아서 해요. 예산이 2천4백억원인 대작 <주피터 어센딩>을 촬영하면서 <도희야>에 도전하는 것처럼요. 그 과정도 재밌어요.

30대 들어와서 생긴 삶의 꿈? 아,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다고 했나요? 딱히 없어요. 그저 남은 30대의 삶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덜 열심히 살았으면 하는 것. 많은 것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또 진정한 대인배가 되고 싶고. 많은 것을 경험한 만큼 덜어낼 줄도 아는 사람이 됐으면. 아, <도희야> 때문인지, 가끔 나이든 내가 시골에서 사는 모습을 그리곤 해요.(웃음)

휴식 후에 정해진 계획이 있나요? 아직 없어요. 여행을 하고... 연말까지 휴식을 취할 거에요. 연초에 좋은 작품이 있으면 또 해야죠.

© SURE, Decembe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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